2021년도 학위 수여식 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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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총장 미나토 나가히로(湊 長博)

湊総長

   교토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실 2,211명 여러분, 석사(전문직) 학위를 받으실 176명 여러분, 법무박사(전문직) 학위를 받으실 129명 여러분, 박사 학위를 받으실 473명 여러분, 대단히 축하드립니다.

   학위 취득자 여러분 중에는 유학생 101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토대학이 수여한 학위는 이로써 석사 학위 88,156개, 석사 학위(전문직) 2,353개, 법무박사 학위(전문직) 2,648개, 박사 학위 47,209개가 되었습니다. 참석한 이사, 관계 부국장,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를 비롯한 교토대학 교직원 일동 모두 여러분의 학위 취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미 2년여에 이르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연구실과 필드에서의 학술 연구 활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는 가운데 학위 연구와 학위 논문 집필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각자의 학위 연구를 관철해 오늘을 맞이하게 되신 데 대해 커다란 경의를 표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교토대학 학위 소지자가 되셨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계속해서 아카데미아 세계에서, 또는 새로이 실제 사회에서 문자 그대로 핵심 인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학위 수여는 도달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학위를 받게 된 올해 2022년은 교토대학에게도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교토대학은 1897년 6월, 칙령에 의해 교토제국대학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올해로 꼭 125주년을 맞은 것입니다. 좋은 기회이니 여러분에게 본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18년이 지난 1886년, 도쿄에 일본 최초의 관립 대학이 설립되어 제국대학이라 불렸습니다. 이는 일본이 근대 국가 확립을 위해 필요한 관료와 기술자 등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급속도로 서구 학술 문화 도입이 진전되면서 일본에서도 독자적으로 학술 연구와 고등 교육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메이지 30년, 즉 1897년에 이곳에 두 번째 제국대학으로 교토제국대학이 설치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원래 있던 제국대학은 도쿄제국대학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교토제국대학 설립에는 ‘마지막 원로’로 일본의 근대화에 몸바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가 크게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긴모치는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국제파 교양인으로 ‘정치의 중심에서 떨어진 교토 땅에 자유롭고 신선한, 그리고 정말로 진리를 탐구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부 차원의 대학을 만들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원을 보면 일본에서 처음 학위령이 교부된 것은 1887년인데, 이는 교토제국대학 설립과 함께 개정되었고 1899년에는 교토제국대학대학원규정이 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대학원 과정이라는 것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어서 학위도 총장 추천과 논문 박사가 주를 이뤘으며, 학위 수여 수도 연간 10건 정도였다고 합니다. ‘교토대학 백년사’에는 1900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 들어온 학생의 회고록이 재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사카 출신으로 (중략) 책을 읽기 좋다고 해서 교토대학 대학원에 들어갔다. 다나베 교수님이 지도 교수이며 격월로 하루 등교하면 되고, 반년에 한 번 연구 성과를 보고하면 되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다나베 교수님이란 ‘일본 근대 토목 공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다나베 사쿠로(田辺朔郎)입니다. 그는 22세에 이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가 되는 공부(工部)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는데 그 졸업 논문 ‘비와호 수로 공사 계획’은 영국 토목학회 최고상인 Telford상을 받는 등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졸업 즉시 기타가키 구니미치(北垣国道) 교토부지사의 청으로 실제 공사를 지휘 감독해 29세 때 지금의 비와호 수로를 완성시켰습니다. 여러분도 재학 중에 이 근처를 산책하며 이 수로와 게아게 발전소 등도 보셨을 줄로 압니다. 미국을 시찰한 다나베는 일본 최초의 수력발전소인 게아게 발전소를 만드는 등 많은 국가 사업에 관여했으며,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교토제국대학 교수, 그 16년 후에는 동 대학 공과대학장이 되었습니다.

   다나베가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장이 되기 5년 전인 1911년에는 당시 35세였던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가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관보에 ‘문부대신이 교토제국대학 병리학 교실 추천을 받아 후쿠시마현 평민 노구치 히데요에게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당시 학위 수여자는 문부대신이었습니다. 그의 학위 논문은 뱀독의 면역학적 특성에 대한 매우 뛰어난 연구로, 현재 본교 의학부 자료실에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학위 수여 교육 과정 차원의 대학원’은 19세기 후반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에 처음 창설되었습니다. 연간 등록금의 몇 배에 달하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고액 장학금을 지원했던 터라 존스홉킨스대학 대학원에는 세계 각국에서 엄선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이윽고 하버드대학, 콜롬비아대학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 확산되었고 매년 미국 전국에서 몇만 명씩 학위 취득자가 배출되어 정부기관이나 민간 기업에서 요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의 학위는 매우 높은 사회적 이점과 존경을 얻게 됩니다.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이 세계의 학술과 연구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배경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우수한 대학원생들이 최첨단 과학 연구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미국형 대학원이 제도화된 것은 1953년 국립대학에 신(新)제 대학원이 설치되면서부터이며, 이를 통해 학위를 대학이 자기 책임으로 심사해 수여하는 미국형 제도가 수립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교토대학 학위 소지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위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사람이 변화하고 도약하는 가장 큰 계기 중 하나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사람과의 만남이라 생각합니다. 본교 공학연구과 출신으로 2001년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신 노요리 료지(野依良治) 박사님은 ‘세계에서 큰 일은 한 사람은 평균 4번 연구실이 바뀌었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직 3번밖에 바뀌지 않아서 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학 졸업 후 20대 후반을 보냈던 뉴욕에서는 그 이후 제 삶과 사고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매우 개성 강한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Gordon H. Sato입니다. 그는 어부이며 정원사이기도 했던 일본계 이민 2세로 1927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시에라네바다 산악 지대의 재미 일본계 주민 강제 수용소, 이른바 만자나르 캠프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고교 시절을 보냈으나 전쟁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공과대학 대학원에서 Max Delbrück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 학위를 땄습니다. Delbrück은 후에 Salvador Luria 등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당시에 이미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유전자 돌연변이에 대한 유명한 논문을 발표하고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Gordon은 이후에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UCSD)에서 생물학 교수가 되어서 Delbrück과 Luria가 개척 중이던 박테리아 유전학의 새로운 기법에 촉발되어 ‘동물 세포를 박테리아처럼 시험관 내에서 완전 인공 배지를 통해 키워내는’ 매우 대담한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연구 과정에서 세포의 생존과 성장에 필수적인 인자를 발견하는 등 큰 성과를 거뒀으며, 이윽고 ‘세포생물학’이라는 새로운 연구 영역의 문을 열어젖히게 됩니다.

   1979년 여름 뉴욕에 있던 저는 샌디에이고의 Gordon의 자택에 며칠간 묵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Gordon은 사적으로는 말수가 없는 사람으로, 매일 밤이 되면 베란다에 나가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대학 은퇴 후 Gordon은 세포의 필수 최소 영양소 연구를 기초로 오염 염수에서 내염성 조류와 작은 새우를 키우고, 거기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양식하는 먹이사슬 사이클을 통한 아쿠아 컬처 시스템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윽고 실제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에리트레아의 불모의 사막 지대에 맹그로브를 심고, 그곳에 새로운 먹이사슬 생산 시스템을 실현시켰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만자나르 프로젝트로, 이를 통해 2005년 지구환경 국제상인 푸른 지구상(Blue Planet Prize)을 수상했습니다. 이 대사업의 배경에 소년 시절을 보낸 만자나르 강제수용소에서의 가혹한 체험이 있었음은 틀림없으며, 제가 목도했던 그 여름날 밤 Gordon의 마음은 이미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불모의 아프리카 사막에 가 있었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1988년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전쟁 중에 강제 수용된 일본계 미국인들에 대해 국가 차원에서 정식으로 사과했는데, 대통령령 서명 후 80주년을 맞은 올해 2월 19일, 바이든 대통령은 다시금 이런 일이 ‘Nidoto Nai Yoni(두 번 다시 없도록)’라는 일본어를 포함한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Gordon은 2017년 세상을 떠났지만 과감하게 새로운 과학을 개척하고 사회에 대한 공헌을 갈망했던 도전 정신은 언제까지나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가능한 한 젊을 때 해외로 나가서 일정 기간 해외 생활을 경험해 보시길 다시금 강하게 권해 드립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학위 수여는 도달점이 아닌 출발점입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세계에서 지금까지 배양해 온 수련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고 마음껏 활약하시길 진심으로 기대하고 응원하며 축하 말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